글 · 박재병

젊은 사람이 죽음을 말하면 사람들이 웃는다

죽음을 미리 설계하자고 말하면 대부분 웃거나 불편해합니다. 그런데 준비하지 않은 죽음의 비용은 전부 남은 사람이 치릅니다.


창가 탁자를 사이에 두고 마주 놓인 빈 의자 두 개의 역광 실루엣

강연장에서 제 소개가 끝나면 표정이 한 번 바뀝니다. 아, 저 젊은 사람이 무슨 죽음 얘기를 하나. 어떤 분은 웃고, 어떤 분은 팔짱을 낍니다.

저는 그 표정을 이해합니다. 죽음은 나이 든 사람의 주제라고 배웠으니까요.

그래서 강연은 늘 제 이야기부터 시작합니다.

저는 십대에 보호자가 되었습니다

농사짓는 집의 늦둥이 막내로 태어났습니다. 위로 누나가 넷 있었습니다. 막내가 태어났을 때 부모님은 이미 젊지 않으셨고, 그 나이 차이가 무엇을 뜻하는지는 한참 뒤에야 알았습니다.

또래가 학교와 친구 이야기를 할 때, 저는 병원 이름과 약 이름을 외웠습니다.

그리고 그 시간은 이십 년 가까이 이어졌습니다.

이십 년 동안 배운 것은 의학이 아니었습니다

그 세월 동안 제가 배운 건 병에 대한 지식이 아니었습니다.

배운 건 아무도 순서를 알려 주지 않는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어느 병원으로 가야 하는지, 등급은 어떻게 신청하는지, 이 비용은 누가 내는지, 이 결정을 누가 내려야 하는지. 매번 처음이었고, 매번 급했고, 매번 나중에서야 “그때 그렇게 했어야 했구나”를 알았습니다.

그래서 회사를 만들었습니다

2018년에 케어닥을 시작했습니다. 거창한 창업 스토리는 아니었습니다. 내가 겪은 그 막막함을 다음 사람은 겪지 않게 하자는 것이 전부였습니다.

그 뒤로 8년 동안 수많은 가족의 마지막 구간을 옆에서 봤습니다. 그리고 확인한 것이 있습니다. 잘 마무리한 가족과 그렇지 못한 가족을 가른 것은 돈도, 정보도 아니었습니다. 미리 이야기를 나눠 뒀느냐 아니냐였습니다.

죽음은 나이 든 사람의 주제가 아닙니다

제가 이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그래서 정반대입니다.

죽음은 나이 든 사람의 주제가 아니라, 그 사람을 돌보는 자녀의 주제입니다. 마지막을 맞는 건 부모지만, 그 마지막을 설계하고 결정하고 비용을 대는 건 대부분 40대와 50대의 자녀입니다.

저는 그 일을 십대에 시작했을 뿐입니다.

우리는 준비할 시간이 있는데 준비하지 않습니다

한국인의 기대수명은 83.7세입니다(통계청, 2024년). 그런데 건강수명은 72.5세입니다(통계청, 2021년). 기준 연도가 달라 단순히 빼면 안 되지만, 대략 10년 이상을 어떤 형태로든 아픈 채로 살다 간다는 뜻입니다.

기대수명 83.7세(통계청 2024년), 건강수명 72.5세(통계청 2021년), 아픈 채로 사는 기간 10년 이상을 보여주는 숫자 카드

10년입니다. 사고사가 아닙니다. 준비할 시간이 10년이나 있다는 얘기입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가족은 그 10년 동안 아무 준비도 하지 않습니다. 그러다 응급실에서 처음으로 결정을 내립니다. 인공호흡기를 달 것인가. 요양원으로 모실 것인가. 형제 중 누가 얼마를 낼 것인가.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결정 몇 개를, 가장 준비가 안 된 상태에서, 가장 시간이 없을 때 내립니다.

준비하지 않은 죽음은 남은 사람의 빚이 된다

여기서 빚은 돈만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돈은 그나마 나눌 수 있습니다. 나눌 수 없는 건 죄책감입니다. “그때 그 결정이 맞았을까.” 이 질문은 장례가 끝나고 몇 년 뒤에도 남습니다. 형제 사이의 감정도 마찬가지입니다. 돌봄을 더 많이 한 사람과 돈을 더 많이 낸 사람은 서로 자기가 더 손해라고 생각합니다.

이 빚은 부모가 남긴 게 아닙니다. 아무도 미리 이야기를 꺼내지 않아서 생긴 빚입니다.

그래서 엔딩플래너다

여행을 갈 때 우리는 계획을 세웁니다. 결혼도 설계합니다. 집을 살 때는 몇 달을 알아봅니다.

그런데 인생에서 가장 확실하게 일어나는 단 하나의 사건, 죽음에 대해서만 우리는 계획을 세우지 않습니다. 확실하게 일어난다는 걸 알면서도요.

엔딩플래너는 거창한 게 아닙니다. 언젠가 반드시 올 일에 대해 미리 순서를 정해 두는 사람입니다. 어떤 치료까지 받을지, 어디서 마지막을 보낼지, 돈은 어디서 나오는지, 남길 것과 정리할 것은 무엇인지. 이걸 미리 적어 두는 것만으로 남은 사람의 빚이 절반은 줄어듭니다.

엔딩플래너가 미리 적어 두는 네 가지: 어떤 치료까지 받을지, 어디서 마지막을 보낼지, 돈은 어디서 나오는지, 남길 것과 정리할 것은 무엇인지

엔딩플래너의 관점

죽음을 준비하는 일은 죽음을 앞당기지 않습니다. 오히려 반대입니다. 준비된 사람은 남은 시간을 병원 복도가 아니라 자기 삶에서 씁니다. 제가 현장에서 본 가장 좋은 마지막은 예외 없이 미리 이야기를 나눈 가족의 것이었습니다. 준비는 비관이 아니라 가장 실용적인 형태의 사랑입니다.

오늘 할 수 있는 것

  1. 부모님 나이에서 83을 빼 보세요. 그 숫자가 앞으로 남은 시간의 대략적인 상한선입니다. 실감이 안 나던 것이 실감이 납니다.
  2. 형제 단톡방에 한 문장만 던져 보세요. “우리 아버지 일, 언젠가 한번 얘기해야 하지 않을까.” 결론을 내지 않아도 됩니다. 꺼내는 것 자체가 1단계입니다.
  3. 이 글을 북마크해 두세요. 앞으로 60편에 걸쳐 순서대로 다룰 예정입니다.

이 글은 준비 중인 책 『엔딩플래너』의 초고입니다. 새 글과 출간 소식을 먼저 받아보시려면 이메일을 남겨 주세요. 주 2회, 화·금 아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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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 사진: CC0 1.0 · Openverse(rawpixel)

박재병 · 케어닥 대표이사

2018년 케어닥을 창업해 요양 돌봄의 전 구간을 만들어 왔습니다. 현장에서 본 ‘그날’을 미리 설계하는 글을 씁니다. 소개 → · 우리가족 엔딩플래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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